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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오디세이 감상기 -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몰라도 빠져든 세 시간

어제 딸아이의 제47회 전국학생과학발명품경진대회 본선 참가 때문에 대전에 내려왔습니다.

작품 설치는 일요일이나 월요일에 하고, 면담심사는 화요일에 진행되는 일정이었어요. 혹시 현장에서 문제가 생길까 봐 저희는 일요일부터 내려와 현대프리미엄아울렛 대전점 옆 호텔 스카이파크 대전 1호점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미리 내려오길 정말 잘했습니다.

영화 보기 전부터 작은 오디세이였습니다

대전에는 오전 11시쯤 도착했습니다. 작품만 설치하고 호텔에 일찍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전자부품이 들어간 작품이라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연달아 터졌어요.

작품은 ESP32와 와이파이를 사용합니다. 작품에 와이파이를 제공하려고 LTE 에그까지 미리 준비했는데, 정작 과학관 안에서 에그의 LTE가 터지지 않았습니다. 작품이 준비한 네트워크에 붙지 못하니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었죠.

“설마 여기까지 와서 인터넷 때문에 막히나?”

ESP32가 과학관 와이파이에 연결되도록 펌웨어를 바꾸려고 맥북을 켰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맥북이 ESP32를 인식하지 않았어요. 와이파이 문제를 고치려는데 펌웨어를 올릴 방법부터 막힌 겁니다.

GPT에 상황을 물어보니 전원 부족 가능성이 있으니 유전원 USB 허브를 사용해 보라고 했습니다. 급히 대회장 근처 하이마트로 가서 유전원 허브를 사 온 뒤 다시 연결해 봤어요. 정확한 원인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유전원 허브를 연결한 뒤에는 ESP32가 인식됐습니다.

그제야 과학관 와이파이를 사용하도록 설정을 바꿔 펌웨어를 다시 올렸고, 작품이 정상 작동하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배선도 다시 살펴보고 하이마트까지 왕복하고 나니 어느새 오후 4시였어요.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 오디세이 공식 이미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
작품 설치 문제를 해결한 날 밤, 계획에 없던 오디세이를 보게 됐습니다. 이미지 출처: 오디세이 공식 영화 사이트·Universal Pictures

오후 9시 50분 영화를 갑자기 예매했습니다

호텔에 체크인해 잠깐 쉬고 현대프리미엄아울렛을 둘러봤습니다. 쇼핑하고 저녁까지 먹은 뒤 호텔로 돌아왔을 때도 영화를 볼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다 쉬면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근처에 메가박스도 있는데 영화나 볼까?”

아내는 피곤해 보여 호텔에서 쉬기로 했고, 딸아이와 둘이 보기로 했습니다. 시간표를 확인하니 오후 9시 50분에 오디세이가 있더라고요.

러닝타임이 거의 세 시간이라 끝나면 새벽 1시쯤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다음 날을 생각해 망설였을 시간이에요. 하지만 메가박스가 있는 현대프리미엄아울렛과 호텔이 바로 붙어 있어 차를 탈 필요가 없었습니다. 걸어갔다가 영화가 끝나면 그대로 걸어오면 됐죠.

그렇게 별다른 계획 없이 심야 영화를 예매했습니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일부 장면을 언급합니다.

처음에는 솔직히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저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잘 모릅니다. 오디세우스라는 이름과 트로이 전쟁 정도만 어렴풋이 알았지, 인물 관계나 여정의 순서는 거의 몰랐어요.

그래서 영화 초반에는 솔직히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이름도 낯설고, 지금 누구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는지 바로 잡히지 않았거든요.

딸아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서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같은 장면을 보는데도 딸아이는 훨씬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게 느껴졌어요.

저는 텔레마코스가 메넬라오스를 만나러 가는 부분부터 슬슬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고, 흩어져 있던 인물과 사건이 조금씩 이어지더라고요.

신화를 몰라도 영화 안에서 필요한 맥락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초반의 낯섦만 넘기니 그다음부터는 이야기가 저를 끌고 갔어요.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을 빠져나온 뒤가 가장 섬뜩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은 건 태양신 헬리오스의 소가 있는 트리나키아섬에서 빠져나온 뒤 배가 난파되는 장면입니다.

깜깜한 밤바다에서 번개가 칠 때마다 화면 전체가 갑자기 새하얗게 번쩍였습니다. 검은 화면과 강한 섬광이 계속 교차하니 눈이 아찔할 정도였어요. 그 빛 사이로 파도에 휩쓸리는 배와 사람들이 순간순간 드러나는데, 바로 앞에서 폭풍우를 맞는 것처럼 섬뜩했습니다. 난파 자체보다 폭풍 한가운데 던져진 듯한 긴장감과 영상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역시 놀란 감독이구나.”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 시간이 가까운 이야기를 크기만 키워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관객이 그 여정 안에 들어와 있다고 느끼게 만들더라고요.

기회가 된다면 CGV 용산아이파크몰 IMAX, 흔히 말하는 용아맥에서 이 장면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시간표를 찾아봤지만 좌석이 거의 다 매진돼 있더라고요. 이번에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맥스 화면으로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남았습니다.

오후 9시 50분에 시작한 심야 영화였는데도 생각보다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세 시간이라는 러닝타임도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초반에는 조금 헤맸지만,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 들어간 뒤부터는 시간이 빠르게 갔습니다.

익숙한 배우들의 이전 배역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한 가지 몰입을 방해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신화 속 인물을 보고 있는데 배우들의 이전 배역이 먼저 떠오르더라고요.

톰 홀랜드가 나오면 스파이더맨이, 젠데이아가 나오면 MJ가 생각났습니다. 두 배우가 한 작품에 함께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이미지가 겹쳤어요.

맷 데이먼과 앤 해서웨이가 등장할 때는 인터스텔라가 떠올랐습니다. 놀란 감독의 이전 영화를 여러 번 본 관객이라면 저처럼 배우보다 과거 배역을 먼저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전체를 망칠 정도의 단점은 아니었습니다. 잠시 지나면 다시 이야기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신화 속 인물로 받아들이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신화를 몰랐던 저와 알고 본 딸의 반응

딸아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서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영화도 대단히 좋게 봤습니다.

반면 저는 원작 지식 없이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인물과 이야기의 방향을 잡느라 시간이 필요했지만, 결과적으로 충분히 재미있게 봤어요.

두 반응을 나란히 놓고 보면 이 영화의 특징이 보입니다.

  •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알고 보면 인물과 사건을 더 빨리 알아볼 수 있습니다.
  • 신화를 잘 몰라도 오디세우스의 귀환기를 따라가며 이야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초반이 낯설 수 있지만 이후의 흡입력은 충분했습니다.
  • 세 시간이라는 상영시간이 부담스러워도 실제 체감은 그보다 짧았습니다.

다만 빠른 전개와 친절한 설명을 기대하면 초반에는 조금 답답할 수 있습니다. 이름과 관계를 바로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영화가 보여 주는 흐름을 따라가는 편이 편했어요.

정리하면

대전까지 내려온 목적은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딸아이의 전국 대회 작품을 설치하러 왔고, LTE 에그가 터지지 않아 하이마트까지 다녀오며 ESP32 펌웨어를 다시 올렸습니다. 정신없는 하루가 끝난 뒤 호텔 옆 영화관을 발견했고, 딸아이와 즉흥적으로 오후 9시 50분 영화를 예매했어요.

그렇게 본 오디세이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거의 몰랐던 저는 초반에 잠시 헤맸지만, 텔레마코스가 메넬라오스를 찾아가는 부분부터 이야기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트리나키아섬을 벗어난 뒤 이어지는 난파 장면은 섬뜩한 영상미로 몰입하게 만들었고, 세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어요. 기회가 된다면 용아맥에서 그 장면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오전 11시에 대전에 도착해 작품 문제를 해결하고, 오후 9시 50분부터 새벽 1시까지 영화를 본 하루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부터 저희 나름의 작은 오디세이를 지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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