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중국 창신메모리(CXMT)에 러브콜을 보냈다가 가격 협상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이 소식을 보고 솔직히 좀 고소했습니다. 문제는 이 글을 맥북으로 쓰고 있다는 겁니다.
애플 제품을 쓰는 것과 애플이라는 회사를 좋아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요.
싸게 달라고 불렀는데 싸게 안 팔겠다고 했습니다
디지타임스 보도를 인용한 맥루머스 기사를 보면 애플은 2026년 들어 창신메모리의 DRAM을 공급망에 넣는 방안을 검토했습니다. 7월에는 실제로 창신메모리 칩을 테스트하기 시작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애플은 공급처 하나를 더 늘리고 싶었고, 창신메모리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내밀 가격 협상 카드로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창신메모리가 애플의 할인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LPDDR5X 가격을 한국 업체보다 싸게 부르기는커녕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준으로 제시했다고 합니다.

애플은 거대한 구매 물량을 공급사와의 가격 협상에 활용해 왔습니다. 사진: Daniel L. Lu, CC BY-SA 4.0. 원본에서 해상도만 축소했습니다.
창신메모리도 싸게 팔 이유가 없었습니다
창신메모리가 특별히 애플을 혼내주려고 한 건 아닙니다. 그냥 싸게 팔 이유가 없었습니다.
창신메모리는 미국의 장비 수출 규제 때문에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심자외선(DUV) 장비로 갑니다. 비슷한 수준의 DRAM은 만들 수 있지만, 공정 단계가 늘고 웨이퍼도 더 많이 들어갑니다. 보도에 실린 분석대로라면 같은 생산량을 내는 데 웨이퍼가 약 30% 더 필요합니다.
중국 안의 수요도 이미 많았습니다. 화웨이와 샤오미가 장기 계약으로 창신메모리 생산량 상당 부분을 확보한 상태라면, 창신메모리가 애플을 잡기 위해 가격을 깎을 이유가 더 줄어듭니다.
창신메모리가 기술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눌렀다는 얘기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공정 제약 때문에 원가를 낮추기 어렵고, 물량을 사갈 중국 고객은 이미 있습니다. 애플에만 싸게 팔 이유가 없었습니다.
애플 입장에서는 공급 부족을 피할 새 공급처와 기존 공급사를 압박할 방법이 모두 필요했습니다. 막상 견적을 받아보니 창신메모리는 할인을 거부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협상력은 더 세졌습니다.
그래서 더 고소했습니다
애플이 큰 물량을 약속해 메모리 업체들의 생산을 늘리게 한 뒤, 그 업체들이 빠져나가기 어려워지면 가격을 후려친다는 메모리 업계의 원망은 이번에 생긴 게 아닙니다.
애플은 2005년 공식 발표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인텔, 마이크론, 도시바와 2010년까지 낸드플래시 장기 공급 계약을 맺고 12억5천만 달러를 선지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아이팟에 들어갈 메모리를 쓸어 담던 애플의 주문 한 번에 공급사의 투자와 생산 계획이 움직이던 시절이었습니다.
2009년 코리아타임스 보도는 그다음에 벌어진 일을 훨씬 노골적으로 전했습니다. 당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애플이 한국 업체에 일정 물량을 생산하라고 요구한 뒤 실제로는 그보다 적게 샀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사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애플이 내부적으로 정한 목표 가격까지 낸드플래시 가격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구매했다는 겁니다. 다른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가격과 물량을 정할 때 우위가 줄었다고 말했습니다.
2010년에도 애플의 대규모 주문 전망에 맞춰 메모리 업체들이 생산을 늘렸는데, 실제 구매가 예상에 못 미치면서 DRAM 가격 하락을 키웠다는 원망이 남았습니다. 이후 엘피다가 파산했습니다. 엘피다의 몰락에는 공급 과잉, PC 시장 침체, 엔화 강세, 부채가 모두 얽혔습니다. 애플 하나만 범인으로 세우기는 무리죠. 공급사를 잔뜩 증설시켜 놓고 발을 빼 가격 폭락에 힘을 보탰다는 원망은 별개로 남았습니다.
2026년 6월에는 마이크론의 수밋 사다나 최고사업책임자가 일부 대형 고객이 수년간 과도한 가격 인하를 요구했고, 그 탓에 메모리 업체의 투자 여력이 줄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름은 꺼내지 않았지만 아주경제를 비롯한 업계 보도가 애플을 먼저 떠올린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급사 입장에서 애플은 물량을 약속할 때도 왕이고, 가격을 정할 때는 더 왕이었습니다.
그 왕이 이번에는 새 공급사를 데려와 기존 공급사를 압박하려다가 “그 가격에는 안 팝니다"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업보처럼 느껴졌습니다.
반도체값이 올랐다고 맥북값도 올렸습니다
최근 애플의 가격 인상을 보면 더 고깝습니다.
애플은 2026년 6월 맥북과 아이패드 가격을 한꺼번에 올렸습니다. 한국에서는 13인치 맥북 에어가 179만 원에서 219만 원으로, 맥북 네오는 99만 원에서 119만 원으로 올랐습니다. 14인치 맥북 프로의 시작 가격도 269만 원에서 329만 원이 됐습니다. 메모리 가격 급등이 이유로 거론됐습니다.
모델별 메모리 원가는 비공개입니다. 몇 달러 오른 원가에 얼마를 더 얹었는지는 애플만 압니다.
대신 애플 전체 제품 사업의 숫자는 볼 수 있습니다. 애플의 2026 회계연도 3분기 실적에서 제품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18.1% 늘었고 제품 매출원가는 8.1% 늘었습니다. 제품 총마진율은 약 34.5%에서 40.1%로 올라갔습니다. 전체 매출은 1,094억 달러로 분기 신기록이었고 전체 총마진율은 50.1%였습니다.
가격 인상은 분기 마지막 이틀에 걸쳤습니다. 그러니 위 숫자는 거의 가격을 올리기 전 성적표인데, 그때도 제품 총마진율은 전년 동기보다 크게 뛰었습니다. 원가 때문에 죽을 맛인 회사의 숫자는 아니었습니다.
톰스하드웨어의 실적 분석을 보면 애플의 재고는 9개월 만에 57억 달러에서 111억 달러로 늘었습니다. 제품 매출 증가율은 매출원가 증가율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공급사에는 메모리값을 깎아 달라고 압박하면서 소비자 가격은 넉넉하게 올리는 모습이 반가울 리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맥북을 씁니다
여기까지 애플 욕을 길게 써놓고 지금 쓰는 노트북을 보면 맥북입니다.
이게 함정입니다.
뭐, 그렇다고 맥북을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제품은 마음에 들고 회사는 얄밉습니다. 메모리 원가를 핑계로 가격을 크게 올린 애플은 욕하면서 맥북은 계속 쓸 겁니다. 창신메모리를 앞세운 공급사 압박이 실패한 장면도 고소하고요.
물론 애플이 나중에 가격을 맞춰주고 창신메모리 칩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번 판에서만큼은 창신메모리가 애플의 할인 요구를 거절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누르려던 시도는 거꾸로 튕겼습니다.
오랜만에 반도체 공급사 쪽이 애플에 “싫은데요"라고 답한 장면을 본 기분입니다.
그리고 네, 이 글을 다 쓴 뒤에도 맥북은 계속 쓸 겁니다.
참고 링크
- DigiTimes - Apple의 창신메모리 협상 카드가 되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협상력을 높였다는 보도
- MacRumors - Apple의 중국 메모리 공급사 활용 시도가 실패했다는 보도
- MacRumors - Apple의 창신메모리 DRAM 테스트 보도
- Apple Newsroom - 2005년 낸드플래시 장기 공급 계약과 선지급 발표
- The Korea Times - Apple의 낸드플래시 과다 주문과 목표 가격 대기 전략을 비판한 2009년 업계 보도
- 아주경제 - 마이크론 경영진의 대형 고객 가격 압박 비판과 메모리 업계 주장
- 이데일리 - 맥북과 아이패드의 한국 출고가 인상 보도
- Apple Newsroom - 2026 회계연도 3분기 실적
- Apple - 2026 회계연도 3분기 연결재무제표
- Tom’s Hardware - 메모리 가격, 재고, 제품 총마진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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